역사

임금님께 진상된 으뜸가는 술, 문배술이 있습니다.

  • 1고려시대의 진상주 문배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조, 군상, 상전에 최고의 음식과 정성을 올리는 전통적인 풍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 음에 해당하는 으뜸으로 술을 말하고 있습니다. 1,000년 전 문배술도 역시 그러한 풍습과 전통 속에 창출된 술로 고려시대로 거슬러가면, 그 당시 신하들은 왕에게 앞다퉈 좋은 술을 진상하여 벼슬을 얻게 되었는데 그중 한 가문의 술이 '문배술'이였습니다. 그  가문에서는 양조비법을 비밀로 하고 왕에게만 '문배술'을 진상하여 왔으나 고려중엽, 후손들에 의해 널리 파급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배술의 설화
고려중엽의 시인 김기원은 대동강변 연광정에서 물배술로 흥을 돋구다가 '대동강 동쪽으로 끝없는 산이 이어지고, 성 한쪽으로는 강물이 질펀하게 흘러가는데'라고 운필하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 옆에 앉은 기생에게 문배술을 따를 것을 명하고 붓을 멈추었는데 문배술의 술맛이 워낙 좋은지라 동석한 시인과 화가들이 서로 앞다투어 문배술을 다 마셔버려 술이 다 떨어졌다 하자 김기원은 '술이 떨어지고 없으니 시흥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붓을 던지고 말았다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 시는 결구가 없는 영원한 미완의 시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 1해방 이후의 문배술

일제시대의 전통주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비법을 자손에게 전수하여 해방이후 2대 이병일 옹께서 평양근처에 평천양조장을 설립하여 문배술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3대 이경찬옹께서 그 양조장을 이어받아 연생산량 3만석, 대지 7,000평, 건평 1,000평, 종업원수 80여명의 규모로 번창시켜 1년치 세금이 평양시 일년 예산과 동일할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 1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이 끝나자 3대 이경찬옹은 다시 집안의 가업을 잇기위해 서울에서 양조장을 설립하여 '거북선'이라는 이름으로 문배술을 다시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난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희석식 소주, 맥주, 막걸리를 제외한 곡식으로 만드는 모든 술의 생산을 금지하게 되었고 이후 20여년간 문배술은 또다시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1986년 문배술은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우수성을 인정받아 3대 이경찬 옹께서 중요무형문화재 86-가호 기능보유자로 지정 1990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전통주의 제조허가를 받아 서울 연희동에서 양조원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전통식품명인(식품명인 제7호)
1995년 전통식품의 계승·발전을 위해 농심수산식품부 장관으로 부터 제4대 이기춘 문배주양조원 대표가 전통식품명인(식품명인 제7호)로 지정되었습니다.